고급유 한 번 넣었다가 5000만원 청구서 받은 이유
· 포르쉐 엔진 전체 교체 진단…수리비 최소 5000만원
· 영업배상책임보험 미가입으로 분쟁·소송 불가피
지난달 25일 경기도 양평IC 인근을 달리던 포르쉐 한 대가 고속도로 진입 직전 도로 한가운데서 갑자기 멈췄다. 공업사 점검 결과 연료 속에 물 500~600mL가 섞여 있었고, 직전에 들른 경기 양평군 A 주유소의 고급 휘발유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차주 구모(53)씨에게 날아온 수리 견적은 최소 5000만원. 피해 차량은 10여 대에 달했고, 해당 주유소에는 영업배상책임보험이 없었다.
고속도로 진입 직전, 어머니와 함께 탄 차가 멈춰 서다
사고는 지난달 25일 저녁 발생했다. 친정어머니와 식사를 마친 구씨는 포르쉐를 몰고 양평IC 방향으로 향하던 중 차량이 갑작스럽게 덜컹거리더니 시동이 꺼졌다. 구씨는 지난 6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르신까지 태우고 있었는데, 뒤에 바짝 따라오던 차량이라도 있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에는 차량 자체 결함을 의심해 공업사에 점검을 맡겼다. 그러나 진단은 달랐다. 공업사는 연료 속에 500~600mL가량의 물이 혼입돼 있다고 설명했다. 차량이 멈추기 직전 A 주유소에서 주유한 고급 휘발유가 화근이었다.
“수분 유입은 혼유보다 심각”…엔진 전체 교체, 5000만원 견적
포르쉐 공식 AS센터는 수분 유입이 혼유(이종 연료를 잘못 주유하는 사고)보다도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했다고 구씨는 전했다. 물이 연료계통과 엔진 내부를 순환하면서 광범위한 손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최종 결론은 엔진 전체 교체였다. 예상 수리비는 최소 5000만원.
혼유 사고의 경우 연료계통 세척과 일부 부품 교체로 수백만 원 선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처럼 수분이 엔진 깊숙이 유입된 경우는 피해 규모가 차원이 다르다. 구씨는 “포르쉐 AS센터에서 이 정도 수분 유입은 엔진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탱크 청소 뒤 배관 마무리 불량, 장마철 빗물이 연료에 섞였다
논란이 커지자 A 주유소 측은 경위를 설명했다. 올해 4월 고급 휘발유 판매 옵션을 새로 추가하면서 저장 탱크 청소를 진행했는데, 청소업체가 배관을 절단한 뒤 마감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틈으로 장마철 빗물이 유입돼 연료와 섞인 것으로 주유소 측은 파악하고 있다. 수분 혼입 사실 자체는 인정한 셈이다.
A 주유소 대표는 “이상 정황을 인지한 직후 고급유 판매를 중단하고 원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수분 유입으로 발생한 객관적 손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다만 엔진 전체 교체 비용에 대해서는 “법적 절차를 통해 객관적 피해 범위가 입증되면 그에 맞게 배상하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피해 차량 10여 대…포르쉐·벤츠·폭스바겐, 오토바이 2대도
주유소 측에 따르면 같은 시기 A 주유소에서 고급 휘발유를 주유했다가 피해를 입은 차량은 포르쉐·벤츠·폭스바겐 등 수입차를 포함해 10여 대에 이른다. 오토바이 2대도 같은 주유소에서 고급 휘발유를 넣은 뒤 도로 위에서 멈추는 피해를 당했다. 주유소 측은 일부 차주들과는 이미 합의를 마쳤다고 밝혔다.
한국석유관리원과 양평군청은 피해 신고가 잇따르자 현장 조사에 나섰다. 간이 시약 검사에서 수분 혼입 정황이 확인됐으며, 현재 정밀 분석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구씨는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난보험은 의무, 영업배상보험은 자율 — 법률이 남긴 공백
이번 사건은 주유소 보험 제도의 구조적 허점을 드러냈다. 재난안전법에 따라 주유소는 화재·폭발·붕괴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는 재난배상책임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그러나 혼유나 수분 유입처럼 영업 과정에서 소비자에게 발생하는 인적·물적 피해를 보상하는 영업배상책임보험은 자율 가입 사항이다.
| 구분 | 재난배상책임보험 | 영업배상책임보험 |
|---|---|---|
| 가입 의무 | 의무 (재난안전법) | 자율 |
| 주요 보상 대상 | 화재·폭발·붕괴 피해 | 영업 과정 인적·물적 피해 |
| 혼유·수분 유입 사고 | 해당 없음 | 해당 |
| 가입률 공식 통계 | 집계 가능 | 없음 |
주유소의 영업배상책임보험 가입률에 관한 공식 통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가입 의무가 없으니 실태 파악도 어렵다. 구씨는 “관련 보험이 있었다면 소비자와 업주가 얼굴을 붉힐 일도 없었을 것”이라며 “의무 가입이 아니다 보니 피해가 고스란히 분쟁과 소송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주유소, 셀프 전환 후 3월에 보험 갱신 끊어
A 주유소는 영업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주유소 측은 “혼유 사고를 대비해 5년간 영업배상책임보험을 유지해 왔지만, 주유기를 셀프 방식으로 전환한 뒤 올해 3월 보험 만기가 도래했을 때 갱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셀프 주유소 환경에 맞는 새로운 보험 상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터진 것이다.
혼유 사고와 수분 유입 사고는 업계에서 드문 일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업배상책임보험 없이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와 업주가 직접 배상 범위를 협의해야 한다. 이번처럼 수리비가 수천만 원에 이를 경우 소송 비용과 기간까지 더해져 피해자의 부담은 배가된다.
정밀 분석 결과가 분수령…배상 범위 두고 법정 다툼 예상
한국석유관리원의 정밀 분석 결과가 이번 사건의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수분 혼입 사실이 공식 확인되면 구씨 측은 민사소송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쟁점은 배상 범위다. 주유소 측은 수분 유입으로 직접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엔진 전체 교체 비용은 법적 판단에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배상 범위를 둘러싼 법적 다툼은 수개월 이상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험 없이 분쟁을 처리해야 하는 주유소 업주에게도, 차량을 수리하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하는 피해 차주에게도 소송은 부담이다. 이번 사건이 영업배상책임보험 의무화 논의의 계기가 될지, 관련 업계와 당국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