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란해 보이던 그 집 지하엔 화덕이 있었다
· 탈출한 제보자 이영순의 신고로 수사 전격 개시
· 전남 영광 급습, 지하 비밀 계단과 화덕 확인
잠복 중 형사에게 걸려온 호출 — 하얗게 질린 여성의 진술
서초경찰서 강력반 한기수 형사가 잠복 근무 중 긴급 호출을 받은 것은 연휴 무렵이었다. 경찰서로 복귀해 마주한 것은 하얗게 겁에 질린 20대 여성이었다. 이영순(27·가명)이라고 신원을 밝힌 그녀는 “사람을 납치해 살해하고 팔·다리를 잘라 불에 태웠다”고 진술했다. 살해 뒤에는 음주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말도 이어졌다.
베테랑 형사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한 형사는 이영순의 팔을 들어 약물 투약 흔적부터 확인했다. 이상은 없었다. 그녀는 8일 전 카페에서 함께 일하던 남성과 새벽에 함께 납치됐으나 혼자만 간신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피해자들도 있어요. 30~40대 부부였는데, 그랜저를 타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당시 고급 승용차의 대명사였던 그랜저의 차주라는 것이었다.
제보를 뒷받침한 두 가지 물증
이영순이 도주하면서 가지고 나온 휴대전화의 명의가 전과자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제보가 들어온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승용차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사고 기사가 실렸다. 목격자는 술 냄새가 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됐다. 피해자를 죽인 뒤 음주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진술과 맞아떨어지는 정황이었다.
이영순이 진술한 고문·살해 수법은 강력계 베테랑 형사들에게조차 매우 낯선 것이었다. “이건 괴물이다.” 한 형사의 말은 경찰서 강력반 전체의 판단이기도 했다.
연휴에도 멈추지 않은 수사 — 형사 7명 전남 영광으로
서초경찰서 강력반은 고병천 반장을 포함한 형사 7명으로 출동 팀을 꾸렸다. 연휴 중 피의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즉각 출동을 결정하게 했다. 전남 영광에 있다는 범죄 아지트가 목적지였다. 밤 11시쯤 서초서를 출발한 일행은 제보자 이영순을 동행시켰다. 단서라고는 그녀의 진술 하나뿐이었다.
6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영광의 집은 형사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마치 어린아이 여럿을 키우는 단란한 가정집 같았다. 형사 한 명이 “번지수가 틀렸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보던 이영순이 창밖을 흘깃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장 다시 고개를 떨궜다. 혹시 범죄자들과 눈이 마주칠까 하는 두려움이 역력했다.
새벽 5시 논바닥 잠복 — 두 시간 만에 대문이 열렸다
새벽 5시, 형사들은 아지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차량 3대로 나눠 잠복을 시작했다. 아지트 주변은 휑하게 뚫린 논바닥이었다.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형사들은 먼 거리에서 쌍안경으로 번갈아 동태를 살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1층 차고 바닥 아래의 비밀 계단
형사들이 아지트를 급습하자 1층 차고 바닥에서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계단이 발견됐다. 겉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구조였다. 형사들이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들어선 순간, 커다란 화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덕 속에서 발견된 것들에 형사들은 기겁했다고 전해진다.
음주 교통사고 위장 — 제보 없었다면 미궁으로 빠질 뻔했다
이 사건에서 범행 은폐 방식은 정교했다. 피의자들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시신을 절벽 추락 음주 교통사고로 위장해 유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신문에 실린 사고 기사와 목격자의 진술은 이 위장을 뒷받침했다. 이영순의 탈출과 제보가 없었다면,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피해자가 그랜저 차주인 30~40대 부부였다는 점은 재산을 노린 표적 범행의 성격을 드러낸다. 고문·살해 뒤 사지를 절단해 화덕에 소각한 수법은 강력계 베테랑 형사들도 “낯선 것”으로 평가했다. 이 사건은 이후 ‘핑크 살인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평온하고 예쁜 가정집처럼 보였던 외관과 지하실의 극단적 괴리가 사건의 특이성을 부각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보 하나가 사건을 뒤집었다
이 수사의 시작점은 이영순 한 사람의 제보였다. 그녀가 도주하면서 확보한 전과자 명의 휴대전화, 그리고 제보 다음 날 신문에 실린 사고 기사가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했다. 서초경찰서 강력반은 이 두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연휴에도 즉각 현장에 출동했고, 전남 영광의 지하실에서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피의자들이 단란한 가정집 외관으로 아지트를 위장했다는 점, 범행 뒤 교통사고로 위장해 유기했다는 점은 계획적·반복적 범행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수사 당국이 이 집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피의자는 누구였는지에 관한 이후 경위는 사건 수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