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전세 20년 만기 퇴거 위기…송파파인타운 ‘1억5000만원으로 어디 가나’

20억 아파트에서 1억5천만원 들고 나가라…20년 세입자의 선택

· 내년부터 서울 장기전세 만기 퇴거 본격 시작
· 입주 당시 3억→현재 시세 20억, 보증금은 1.5억
· 무기한 연장·우선분양권·명도소송 장기화 3단계 대응

지난달 11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한 대형 교회 지하 강당에 180여 명이 모였다. 5,000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 ‘송파파인타운’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장기전세주택 세입자들이었다. 이들 앞에는 하나의 공통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입주 당시 3억원 중반대에 분양됐던 아파트가 지금은 20억원을 훌쩍 넘는데, 손에 쥐고 나가야 할 전세보증금은 1억5000만원 수준에 그친다는 것이다.

장기전세 20년, 제도 설계가 예상하지 못한 것

장기전세주택은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가 2007년 ‘시프트(SHift)’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급한 공공임대주택 유형이다. 주변 시세보다 낮은 전세보증금으로 최장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핵심이다. 당시 기준에서 20년은 충분한 주거 안정 기간으로 평가됐다. 입주자들이 그 기간 동안 자산을 형성하고 독립적으로 주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제도가 출범했다.

그 전제가 무너졌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제도 도입 이후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급등하면서, 20년이 지나 만기가 도래하는 시점에 입주민들이 처한 현실이 달라진 것이다. 임차인 위원회에 따르면 내년부터 퇴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파악된다.

3억에 들어온 집이 20억이 됐다…보증금 1.5억의 간극

올해 85세인 정길자씨는 2008년 송파파인타운 9단지에 입주했다. 당시 분양가는 3억원 중반대였다. 17년여가 지난 지금, 같은 단지 31평형(약 102㎡)의 매매가는 20억원을 넘나든다. 그러나 정씨가 퇴거하면서 돌려받을 전세보증금은 1억500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어딜 가. 1억5000만원 갖고 나가서 어디서 살아요.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사는 아직 생각도 안 해봐서 어딜 가겠다고 말할 게 없죠.” 정씨의 말이다. 이날 설명회에 함께 참석한 박오연(67)씨도 “애들만 넷인데 이 돈을 받고 어딜 가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수치가 보여주는 격차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입주 당시 분양가와 현재 시세 사이의 차이가 약 16억원을 웃도는 반면, 퇴거 보증금은 1억5000만원에 머문다. 이 금액으로 서울 강남권 인근에 새 거처를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입주민들의 공통된 호소다.

항목 2008년 입주 당시 2026년 현재
송파파인타운 31평 매매가 약 3억원 중반 20억원 이상
퇴거 시 전세보증금 약 1억5000만원
검토 중인 분양가 기준 건설 당시·매각 시점 감정가 중간값(미확정)

임차인 위원회의 세 가지 요구안

‘서울특별시 공공임대주택 임차인 권익증진 위원회’는 이날 설명회에서 세 가지 요구안을 제시했다.

  • 계약 무기한 연장: 입주민이 사망할 때까지 계약을 계속 갱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다. 이광훈 위원장은 “유럽 등 선진국처럼 무기한 계약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우선매수청구권 부여: 연장을 원하지 않고 분양을 희망하는 가구에 한해 개별적으로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분양가는 ‘건설 당시 감정가와 매각 시점 감정가의 중간값’을 적용하는 안이 검토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수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반도체 초과세수 활용: 기존 입주민을 보호하면서 청년·신혼부부 등 다른 취약계층의 주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별도 재원으로, 반도체 초과세수를 활용해 임대주택을 신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분양가 산정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크다. 건설 당시 감정가(3억원대)와 현재 시세(20억원대)의 중간값이면 대략 11~12억원 수준이 된다. 이 기준이 현실화될 경우, 공공임대주택 분양 전환 원가 산정을 둘러싼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명도소송 3년’ — 전략으로 공개된 버티기 로드맵

임차인 위원회가 이날 공개한 실질적 대응 로드맵은 단계적이다. 1단계로 계약 만기까지 거주를 유지한다. 2단계로 퇴거 준비 기간으로 주어지는 약 6개월을 소진한다. 3단계로 서울시·SH가 명도소송을 제기하면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장기화하면서 시간을 번다.

이광훈 위원장은 설명회에서 “명도소송에만 길면 3년, 짧으면 1년씩 걸린다. 전문가(변호사)를 섭외하면 같이 시간 끌면서 정권 교체를 기다리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법적 권리 행사를 넘어,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기조 변화를 명시적으로 겨냥한 장기전 전략임을 드러낸다. 소송 장기화 전략이 실현될 경우 서울시와 SH는 수백 가구에 달하는 명도 분쟁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행정적 부담도 떠안게 된다.

정치권으로 번지는 갈등

이번 사안은 정치권으로도 확산되는 양상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진철 서울시 의원이 설명회에 직접 참석해 “입주민 보호를 위해 서울시·SH 측과 논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또 “정원오 전 성동구청장이 서울시장 선거 후보였을 당시, 캠프 측과 장기전세 입주민 퇴거 문제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기로 구두로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공식 문서로 확인된 합의가 아닌 구두 합의 수준이며, 실제 이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울시의 딜레마: 두 개의 ‘을(乙)’

서울시와 SH는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서울시는 이미 기존 입주민 퇴거 후 해당 세대를 신혼부부·청년층 대상 ‘미리내집’ 사업으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미리내집은 신혼부부·출산 가구 등을 대상으로 시세보다 낮은 조건으로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서울시 사업이다.

문제는 형평성이다. 20년을 살아온 고령 세입자들에게 예외를 인정하면, 새 입주를 기다리는 청년·신혼부부라는 또 다른 취약계층이 피해를 입는다. 두 집단 모두 주거 취약계층이라는 점에서,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더라도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서울시의 고민이다. 공공임대주택의 제한된 공급량 안에서 누구의 필요를 우선시할 것인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

제도 도입 20년, 정책 설계의 빈틈을 어떻게 메울까

장기전세주택이 처음 공급된 2007년, 20년 후 서울 아파트 시세가 이 수준에 이를 것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입주자들이 20년 뒤 독립적으로 주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제도 설계의 전제 자체가 부동산 시장 환경의 변화로 흔들린 것이다.

임차인 위원회에 따르면 내년부터 퇴거가 시작된다. 5,000세대가 넘는 대단지에서 순차적으로 만기가 도래할 경우, 사안의 규모와 사회적 파급력은 개별 가구의 분쟁을 넘어선다. 서울시가 어떤 정책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후 유사 공공임대주택 제도의 만기 처리 방식 전반에도 선례가 남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해법 마련을 위한 제도적 논의가 본격화될지 주목된다.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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