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억 메모’가 촉발한 수사, 연희동까지 뻗었다
· 904억 기재 ‘김옥숙 메모’가 수사 핵심 단서
· 노재헌 대사 재단·전직 비서관 자택도 포함
연희동 사저 압수수색, 21일 전격 단행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8월 21일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머무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이날 수사는 사저 단독이 아닌 복수의 장소를 동시에 겨냥한 전면적 강제수사였다.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명칭 그대로 불법 취득 재산을 추적하고 몰수·추징을 전담하는 조직이다. 검찰이 적용한 혐의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과 조세포탈이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은 불법으로 취득한 재산을 합법 재산처럼 위장하거나 은닉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로, 위반 시 형사처벌과 함께 해당 재산에 대한 몰수 및 추징이 가능하다. 사망한 인물의 유족을 상대로 이 법이 적용된 사례는 많지 않아, 법조계에서 이번 수사의 법리적 전개를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압수수색 대상, 재단과 비서관 자택까지 확대
이번 압수수색의 범위는 연희동 사저에 그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주중한국대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동아시아문화재단과 노태우센터도 수색 대상에 올랐다. 아울러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비자금 은닉을 위한 차명 계좌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는 당시 비서관들의 자택도 동시에 압수수색 목록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시아문화재단이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은, 재단이 비자금 자금 흐름의 경로 중 하나로 의심받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만 재단의 구체적 역할과 혐의 범위는 검찰이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은 상태다. 노재헌 대사는 현재 중국에 주재 중인 현직 외교관이어서, 수사가 기소 단계로 나아갈 경우 외교적 파장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옥숙 메모’—904억원이 적힌 자금 내역서
이 사건의 핵심 단서로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김옥숙 메모’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측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판부에 제출한 문서로, 904억원 규모의 자금 내역이 기재된 것으로 전해진다.
노 관장 측은 이 메모를 근거로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사돈 관계였던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에게 전달돼 당시 선경그룹(현 SK그룹의 전신)의 경영 활동에 활용됐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SK그룹의 재산 형성 과정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직접 기여했다는 구도가 성립하는 셈이다. 노 관장 측은 이를 재산 분할 기여도의 근거로 법원에서 다퉜다.
메모의 법적 효력과 진위에 대해서는 민사 재판 과정에서도 쟁점이 됐다. 검찰이 형사 수사에서 이 메모를 어떤 방식으로 증거로 활용할지, 또 메모에 기재된 자금 흐름을 어느 범위까지 입증할 수 있을지는 현 단계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혼 소송이 열어젖힌 비자금 논란
이 의혹이 공론화된 직접적 계기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 소송이었다. 민사 재판에서 재산 분할을 다투는 과정에서 노 관장 측이 SK그룹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도를 주장하며 관련 자금 흐름 자료를 제출했고, 이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자금의 존재가 외부에 드러나게 됐다.
이혼 소송과 재산 분할 과정에서 제출된 증거가 형사 수사의 단서로 이어지는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민사와 형사는 절차와 입증 기준이 다르지만,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자료는 별도 형사 수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이혼 소송의 증거 자료가 고발과 검찰 수사로 이어지는 경로를 밟았다.
5·18기념재단 고발로 수사 공식화
검찰 수사는 5·18기념재단 등이 제출한 고발장이 계기가 됐다. 고발 내용은 김옥숙 여사, 노소영 관장, 노재헌 대사 등 노 전 대통령 일가가 비자금을 은닉하고 세금을 포탈했다는 취지다.
5·18기념재단이 고발인으로 나선 것은 역사적 맥락과 연결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3~1994년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수사에서 반란죄·내란죄와 함께 비자금 관련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복권됐으며, 2021년 사망했다. 이번 수사는 당사자가 아닌 유족과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거 수사와는 법적 구조가 다르다.
이번 수사의 주요 사실 관계 정리
| 항목 | 내용 |
|---|---|
| 수사 기관 |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 |
| 주요 혐의 |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조세포탈 |
| 압수수색 대상 | 연희동 사저, 동아시아문화재단, 노태우센터, 전직 비서관 자택 |
| 고발인 | 5·18기념재단 등 |
| 핵심 단서 | 904억원 기재 ‘김옥숙 메모’ |
| 수사 촉발 계기 | 최태원-노소영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자금 존재 드러남 |
향후 수사 방향과 법적 쟁점
검찰이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어떤 자료를 확보했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수사가 기소로 이어질 경우, 크게 두 가지가 주요 법적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주범인 노 전 대통령이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유족을 상대로 한 범죄수익 추징이 법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가능한가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은 제3자에 대한 추징 규정을 두고 있으나, 사망한 범죄자의 유족에게 이를 적용한 판례는 제한적이다. 둘째, 피의자들이 실제로 은닉·포탈 행위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하느냐다. 메모 한 장이 이를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자체가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할 사안이다.
검찰이 확보한 자료 분석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 결과에 따라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 문제가 사망 이후에도 다시 전면적인 법적 판단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추가 소환 조사나 기소 여부는 향후 수사 진행 상황에 달려 있다.
출처: JTBC